소개

고 이태영 박사가 본 홍부길 교수

내가 이화여자대학교에 27세 나이로 교수가 되었을 때 제일 처음 만난 분이 당시 법정대학
학장이셨던 이태영 박사이다. 이태영 박사는 1991년 그가 일생 동안 만난 많은 분들의 이야
기를 "나의 만남 나의 인생"이라는 이태영 자전적 교유록으로 펴냈다. 다음의 글은 이책의
199-202쪽에 수록된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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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강좌를 함께 만든 홍부길 교수



1963년 이화대학 법정대학장으로 임명받고 나는 기존의 법정 계열 학과에다 상과와 경제학과 등을 증설했다. 그리고 1970년에는 법정대학 창설 25주년 기념으로 경영연구소를 설치했다.


  나는 상경학에 대해 문외한이다. 그러나 여성도 하루바삐 이 방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전문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했다. 왜냐하면 그당시 국가적인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국민경제가 발전일로에 있었고, 그에 따라서 대재벌과 신흥부자들이 많이 생겨나면서여성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간에 많은 기업들이 가족들을 주주로 삼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타인을 주주로 만드는 것보다 가족들을 주주로 가족 회사를 만들면 불안과 불편함을 훨씬 덜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장의 단독기업인 것이나 다름이 없어, 가족 주주들은 일부 주식이 자기 명의로 되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에 경영에 있어서 의논의 대상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주주이면서도 주주로서의 권리 행사를 할 줄도 모르고 할 수도 없는 여성들이 대부분이라고 들었다.

  한편 여사장, 여성 경영인들도 제법 한두 사람씩 늘어가는 때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나는 우선 우리 법정대학 경영학과에서 하루빨리 공부시켜 여성 회계사도 나오고, 여성 경영인도, 여성 세무사도, 여성 주주, 여성 사장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새로 신설된 상과나 경제학과 학생들이 빨리 성장하기를 초조히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나는 상담소 건물을 지으면서도 1,2층은 여성 은행으로 설치할 준비를 갖추고 건축설계구상을 할 만큼 경제, 경영 분야에서도 여성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고대한 사람이었다. '미국 대학은 성인 여성교육을 하는 데도 있는데....' 부럽다는 말을 혼잣말로 비치기 시작했는데, 마침 경영학과의 홍부길 교수가 지나가는 말로 내 귀가 번쩍 뜨이는 아이디어를 살짝 비쳤다.


   어린 학생들이 크길 기다릴 게 아니라 관심 있는 여성들을 모아 교육시키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나는 바로 그순간 "바로 그겁니다. 그런걸 하자는 말입니다. 내가 그 방면에 전문가가 아니어서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요. 홍교수님, 잘 생각했습니다." 옳은 생각이라고 판단되면 가만 있지 못하는 내 성격에 당장 그 자리에서 "합시다"라는 말로 내 결심을 보였다. 그리고 지체없이 총장의 동의를 얻었다.


  하루빨리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학생을 모집하러 거리로 뛰어나갔다. 내 기억에 있는 여사장, 여성 사업주, 주주들, 거의 대부분이 내 친구들인 까닭으로 마흔이 넘은 친구들을 설득시켜 첫 수강생으로 60명을 모집해 왔다. 이화대학 시작할 때 설립자가 학생 모집하던 바로 그 모습을 생각하며 나 혼자 웃으면서 흥이 나 의도적으로 달렸다.


  그랬더니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법정대학장은 어쩌자고 유한마담들을 깨끗한 처녀들의 학교 캠퍼스에 모아들이냐는 항의였다. 학생들, 교수들 할 것 없이 모두 비난의 소리가 자자했다. 거기에다 수강생들 사이에서는 그들대로 시비가 벌어졌다. "저 여자는 요릿집 주인인데....", "저 여자는 뭐하던 사람인데....", "저 여자는...." 하면서 다 큰 어른들이 자기들끼리 격을 따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왔다.


  그 틈새에서 그야말로 나와 홍부길 교수만 죽을 지경이었다. 수강생들이 요즘처럼 양장을 하거나 단정한 무릎 길이의 짧은 치마를 입었던들 그렇게 심한 반발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련만, 어디 나들이가는 사람들처럼 예쁘고 화려한 한복을 차려 입고 나왔으니 학생들에게 마치 유한마담들을 모집한 것처럼 보여 거부감을 가진 것 같은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귀도 막고 눈도 감고 나몰라라는 듯이 동의해 준 총장만 믿고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2기와 3기 때까지 직접 학생 모집에 나섰는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40기의 이수생들이 나왔으며, 등록 희망자들이 몇 년 뒤까지 예약되어 있고, 나에게 입학을 부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서울에서 이화대학 법정대의 경영강좌를 이수하지 못한 사람은 행세를 못할 지경이라고 하니 나로서는 금석지감을 느끼며 홍부길 선생으로 인해 설립자의 공(功)을 얻었으니 이화에 몸담았던 보람의 하나로 꼽아진다.


  더욱이 내가 흐믓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은 그 졸업생들이 흩어지지 않게 동창회를 조직하도록 아이디어를 주어 '이영회(梨營會)'(이대의 경영 강좌를 받은 사람들이 모임)라는 이름까지 붙여 주었던 일이다. 그 모임이 얼마나 커지고 조직적이고 재미있게 잘 운영되는지 몇해 전에 학교 안에 '경영관'이라는 번 듯한 새 건물까지 졸업생들의 힘으로 지어 학생들의 장애 없이, 오히려 다른 학생들과 교수들이 요긴하게 쓰고 있으니 지금에 와서는 원망하던 강좌로 인해 학교가 큰 덕을 보는 셈이다. 여러 면에 공헌을 하는 것을 보고 실로 자랑스럽기도 하고 설립한 사람의 입장에선 마음을 놓게 된다. 또한 '이영회'는 학교에 장학금을 출연하고 그들끼리의 친목을 계속 이어가 여성들의 모임 중 큰 조직의 하나로 보인다.


  그 모든 공은 시작을 하고 결단한 나에게 있기 보다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홍부길 교수에게 그 공이 돌아가야 된다. 경영연구소가 아무 말썽도 없이 튼튼하게 기반이 잡혀 20년 넘게 우리 여성들에게 유익한 연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뛰어난 경영, 행정 능력과 정직, 성실한 덕이다. 그는 두뇌회전이 매우 빠르고, 경영학 교수답게 조직의 경영과 행정능력이 돋보여 이화 10년 발전기획위원회의 위원이 되기도 하고 이제는 이화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진 교수가 되었으니, 내가 모셔온 홍교수의 성장이 대견하기만 하다.


  경영연구소의 경영과정이 매 기(期) 시작될 때마다 첫날 첫 강의시간을 굳이 내게 부탁하는 것도 이 강좌를 시작한 사람에게서 설립 동기와 왜 뒤늦게 이 강좌를 들어야 하는가하는 점들을 직접 듣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아서 주저없이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의기 양양하게 나서곤 한다. 강좌가 왜 꼭 있어야 하고, 왜 꼭 들어야 하는가 하는 그 의미를 시작한 당사자가 살아 있는 한 강의하라는 명령으로 알고 나는 몸이 불편할 때도 부지런히 흥이 나서 달려가곤 한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계속하니까 전부 다 되어가는 것 같아 매우 흡족하다. 성인교육이 성공한 모델 케이스일 것 같다.


  이화에 봉직하면서 남긴 몇가지 일 가운데 눈에 보이는 일 하나가 바로 이 경영연구소를 설치하고 경영 강좌를 시작한 일이다. 이로부터 이화의 평생교육이 한국의 평생교육의 시작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끝으로 바라건대 '겉으로는 보기에 좋구나' 하는 감탄도 좋고 동창생끼리 가진 즐거운 모임도 좋으나, 알맹이가 있고 사회활동에 유익한 자질을 높일 수 있는 강좌가 마련되고, 그 강좌를 통해 주주로서, 사장으로서, 경영인으로서 명실 상부한 실력자가 되어 가업(家業)과 회사 경영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성실한 여성 지도자로 사회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며 기대한다.


  내가 외국인들로부터 종종 듣는 말이 한국이 잘될 징조는 한국 여성들에게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경영연구소의 강좌나 이영회 회원들이 이 민족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를 기대하는데, 그 마음은 홍부길 교수도 나와 똑같을 것이다.


'이화인'이 다 된 홍부길 교수에게 다시 감사드린다.